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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Rock

어느새 올 한 해도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2003년. 하지만 범위를 음악 쪽(그 중에서도 록음악)으로 좁힌다면, 놀라울 정도로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한 해였다. 흔히 떠도는 말로 '록은 죽었기 때문'일까? 물론 록이 전성기는 물론 쇠퇴기조차 지난지 오래라는 현실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1990년대 후반 얼터너티브 록의 붕괴 이후, 록은 현재까지 전세계 팬들을 단숨에 사로잡을만한 획기적인 흐름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록이 마냥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고만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2003년 영미 록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거라지 록 리바이벌(Garage Rock Revival, 또는 네오 거라지 록(Neo Garage Rock)으로 불리기도 함)'의 오버그라운드화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초반 미국 디트로이트 지역과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지역에서 만개하기 시작한 거라지 록 리바이벌은, 2003년에 이르러 대중들의 커다란 관심을 모으며 록의 전면에 떠올랐다. 네오 거라지 록의 간판 밴드들인 화이트 스트라이프스(The White Stripes)스트록스(The Strokes)는 올해 각각 [Elephant][Room On Fire]를 발표, 큰 인기를 모았다. 물론 이들의 출세작인 [White Blood Cells](2001)나 [Is This It](2001)의 놀라운 완성도를 상기해보면 일말의 아쉬움은 남지만, 최근 몇 년간 록의 침체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고무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들 외에도 예 예 예스(Yeah Yeah Yeahs)와 댓선스(The Datsuns) 등의 네오 거라지 록 밴드들이 복고풍의 록 사운드로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올해 영미 록의 또다른 주목할 만한 현상은, 거장 또는 베테랑들이 대거 컴백작을 내놓았지만 대중들에게 이렇다할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신인 로커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올 한해는 '풍성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모처럼 내놓는 고참 록 뮤지션들의 음반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닐 영(Neil Young), 데이빗 보위(David Bowie), 메탈리카(Metallica), 라디오헤드(Radiohead), 블러(Blur), 드림 씨어터(Dream Theater),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트래비스(Travis) 등이 얼른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불행히도 '옥석'이 섞여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로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닐 영이 내놓은 음반 [Greendale]은, 늘 창의적이고 진정성으로 가득하던 기나긴 그의 음악경력이 이젠 확실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음반보다는 드디어 CD로 발매된 [On The Beach](1974), [American Stars 'N Bars](1977), [Re-ac-tor](1981) 등이 훨씬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거장의 최신 음반보다 차라리 과거의 평작(또는 실패작)이 더 낫게 들린다'는 딜레마는 메탈리카에게도 적용된다. 모처럼 만에 내놓은 (그들 나름대로의) 회심의 역작 [St. Anger]는 안타까운 한숨만 나오게 만드는 음반이다. 물론 음반 자체는 그런대로 들어줄만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Master Of Puppets](1986), [...And Justice for All](1988), [Metallica](1991) 등이 성취한 '역사적인' 완성도를 기억한다면, [St. Anger]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구림'의 미학은 듣는 이에게 엄청난 당혹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러한 실망감은 '상대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음반 그 자체로 평가할 것이냐, 아니면 뮤지션의 전체적인 커리어의 맥락에서 완성도를 파악할 것이냐. 라디오헤드의 새 음반 [Hail To The Thief]는 여러 가지 회의적인 시각의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별다른 하자가 없는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 시대 최고의 록밴드로 불러도 전혀 무리가 없을 라디오헤드는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실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이 [OK Computer](1997) 때처럼 더 이상 신선하게 들리지는 않는다는 일말의 문제점은 있다.

'완성도는 일정 수준을 넘었지만 신선하지 않다'는 명제는 고참 로커(또는 아마도 예술업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들을 조이는 숙명적인 고뇌일 것이다. 데이빗 보위, 블러, 드림 씨어터 등은 올해 평판이 좋은 음반을 내놓았지만, 불행히도 대중들은 그들이 최전성기 때 보여준 놀라운 음악 세계에 대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 이미 경력의 정점을 지난 이들이 내놓는 작품이란, 늘 과거의 찬란한 업적과 비교 당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나게 되어있다. 물론 이러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고갈되어 가는) 창의력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데이빗 보위, 블러, 드림 씨어터가 찬사받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갓스맥(Godsmack), 린킨 파크(Linkin Park), 림프 비즈킷(Limp Bizkit) 등의 새 음반을 들어보면, 등장할 때부터 '아류'스러웠던 이들은 역시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깨달음을 얻게된다.

뜻하지 않게 맞닥뜨리게 되는 '굴레'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미 과거의 유물로 사라진줄만 알았던 전설의 명인들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불현듯 시장에 등장하는 광경으로부터도 흥미로움과 당혹으로 범벅이 된 복잡미묘한 감정을 맛보게 된다. 여름휴가철과 연말연시만 되면 부지런히 등장하는 잡다한 '컴필레이션' 음반은 논외로 치더라도 말이다. 올해 '돌아온 유령'의 대표주자는 단연 비틀즈(The Beatles)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비틀즈의 경우는 영화 [A Hard Day's Night]과 방대한 다큐멘터리 [Anthology] DVD 발매부터 시작되어[Let It Be] 음반을 전면 개작한 [Let It Be... Naked]로 2003년을 마무리 지었다. 레드 제플린은 미공개 라이브 음반 [How The West Was Won]과 [Led Zeppelin] DVD가 동시에 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과거의 유물이 테크놀로지로 상징되는 현재의 손길에 힘입어 마치 현재진행형인양 우리 앞에 나타나는 풍경은 적지않게 감동스럽지만, 여기에는 명백히 일종의(사실은 노골적인) '장삿속'이 개입되어있음을 씁쓸히 곱씹어 보게된다.

그리고 록음악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젊음의 혈기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반항심을 가장 빼어나게 구체화시킨 예술 양식이 록이지만, '대중예술'이 그러하듯 여기엔 '자본'의 개입이 불가피함을 볼 때, 거장들의 현재 또는 유물을 대하며 나도 모르게 배어나오는 일종의 비애감은 사실 그럴싸한 사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록음악이란 무엇보다도 '새로운 피'가 원활하게 돌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성립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미 록의 2003년은 언제 보아도 익숙한 그 얼굴들이 열심히 활동하다 저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실망을 품기에는 다소 성급한 것 같다. 록의 본질 중 하나이자 묘미는, 언제 어디서 대단한 신인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적지 않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2004년은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 도처에 만발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2003년 총결산을 어설프게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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