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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side

글쓰기 광증에 대한 인용.이랄까 사색이랄까.



사고의 발단:
나의 사고의 확장, 사색. 그리고 그에 대한 기록은 어떠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


최근 넘쳐나는 SNS, 블로그, 또는 자전적 출판의 엄청난 증가를 인식하며,

오프라인상의 메모나 일기장이 아닌 온라인 상의 공간에 글을 끼적대지만 그 공간의 특징과 의도된 대상으로 인해 백만번 머뭇거리며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아 이경우엔 머뭇거림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는데 대부분은 '허세'나 '오해', 혹은 '찌질함' 등으로 나타날 어설픈 지인들의 반응에 대한 염려일 듯)


- 목소리, 말, 얼굴, 동작, 혹은 이를 다 아우르는 영상, 혹은 그 구체성을 최소화하여 어느 정도의 '오해'를 허용함으로써 불특정 다수 에 대한 리스크는 줄이되 내가 의도한, 이상적으로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그 누군가(the one) 에게 의사소통 하고자 하는 그림이나 음악을 차치하고서라도, -

'글'
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과 유의미성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더불어 최근 재밌게 읽은 몇몇 텍스트에서 몇가지의 해석을 가져올 수 있었음에 이를 기록한다.


#1. 밀란 쿤데라(웃음과 망각의 책 중)

[택시 기사의 일화] 택시 운전사와 나눈 대화는 내게 불현듯 작가 활동의 본질을 밝혀 주었다. 우리가 책을 쓰는 건 우리 아이들이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아내가 귀를 틀어막기 때문에 우리는 익명의 세상에다 말을 하는 것이다.

글쓰기 광증이란 편지나 일기를 쓰려는 욕망이 아니라 책을 쓰려는 욕망이다(즉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 글쓰기 광증(책을 쓰려는 강박증)은 사회 발전이 세 가지 기본조건을 충족할 때 전염병의 차원이 된다.

1.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져서 사람들이 무익한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
(Comt; '무익함'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래 뮈리엘 바르베리의 글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

2. 사회 생활이 많이 세분화되어 전반적으로 개인의 고립화가 깊어졌을 것.

3. 국가의 내적 삶에 큰 사회적 변화가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을 것.
(이 관점에서 볼 때 거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프랑스에서 작가 비율은 이스라엘보다 스물한 배나 높운 것이 이 징후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이는 비비가 "바깥에서 볼 때 저는 전혀 산 게 아니에요"라는 말로 잘 표현했다.- Comt; 오늘날 우리 삶의 가장 큰 모험이 모험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내적화된 모험이라 할까, 아니면 모험에 대한 갈망의 내면화라고나 할까-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부추기는 동인은 바로 이 삶의 내용의 부재. 그 공허다)

그러나, 전반적 고립은 글쓰기 광증을 낳고, 일반화된 광증은 다시 고립를 심화한다. 저마다 거울 담을 쌓듯이 자기 말을 담처럼 쌓아올려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2. 뮈리엔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에서)

진리의 단순성이, 콜롱브 조스가 그녀의 중세 문헌의 독서로부터 끄집어낸 교훈에 한해서는 "진리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
..
특권은 '진짜' 의무들을 준다 폐쇄적인 조그만 엘리트 집단에 속한다는 것은 이 소속의 대가로 거두는 물질적인 삶에서의 영광과 유려함에 비례하여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콜롱브 조스처럼 미래가 열린 고등사범학교 학생(엘리트 집단)이라면?
나는 인류의 진보에, 인간 종의 생존, 복지, 교육의 중차대한 문제들의 해결에, 또 세상 속으로의 아름다움의 도래, 또는 진정한 철학을 의한 정의의 십자군에 관심을 다져야 할 것이다.
사상을 드높이고,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것.이 아니면
반대로 자기 자신의 영속화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고, 비생산적인 엘리트들의 자가생산 말고는 다른 기능을 가지지 못하는 스콜라적 신학파에 합류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학은 신흥종교가 된다.

#3. 모기의 Facebook 글 (허락받지 않은 인용임을 밝힘)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인터넷에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와 목적중의 한가지를 생각해 본다면 일단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내글의 열렬한 독자는 일차적으로 나 자신이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곧잘 당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나의 이런 글쓰기가 집중되는 시기는 사회운동과 정치에서 내 삶이 멀어지고 부터다. 의식은 내버려두면 녹이 쓴다. 그래서 나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뇌에 기름을 치는 행위다. 그래서 주로 사회적 이슈나 시사적인 주제에 글이 거의 편중되어 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나는 천재적 재능을 갖춘 사람도 아니고 공부를 업으로 여기는 사람도 아닌편이기에 나의 사회적 의식의 파편들을 곰곰히 진지하게 검토하고 짜맞추고 개발하는 기회들은 거의 갖지 못한채 그냥 술문화에 쩔어 지내다 툭하면 주변의 젊은 친구들에게 술자리에서나 유통되는 개똥철학을 진지하게 읊어대는 꼰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겟다. 아니면 10년 넘는 장사의 경험을 포장해서 '신촌 자영업자 생존하는 법'같은 장사꾼 자기계발서따위나 써냈을수도...
이런면에서 인터넷과 SNS는 나같은 개인에게 엄청난 축복이다.

자기글의 일차적 독자가 자신이고, 자신을 설득한다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이건 타인을 설득하는 문제와는 좀 다르다. 이건 설득보다 '존중'과 관련이 있다.
나는 종종 웅렬군이 저리 길게 글을 써놓은 것을 보며 '참 부질없다'고 느끼고 전혀 동의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웅렬군의 글에서도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과 설득'이 읽혀진다. 사실 이 부분은 내가 본받아야 할 정도로 뛰어나다.
때문에 내가 지금처럼 이런 민감한 주제로 이 친구에게 말을 걸고자 할때 나 역시 굉장히 많은 생각을 자신에게 짜내야 한다. 이건 설득 이전에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설득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꼭 타인을 설득시키려고 바둥대는 거 부질없다.
각자가 자신의 스타일대로 일관되게 자신의 사유와 의식에 충실하고 그것을 서로 알아보고 존중해주는것 그것만으로도 이 사회의 진보엔 충분조건이 될 수 있다.

(Comt;)

내가 최근 흥미롭게 읽었던, '글'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이 세가지 텍스트들, 특히 밑줄 그은 부분들을 봤을 때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글쓰기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해 -6개월동안 탱자탱자 놀아서 컨설턴트의 감을 잃어버릴 법 하지만, 전공을 살리자면- 세 개의 텍스트 모두 (MECE한 구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아래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 글을 쓰는 주체:
#2의 경우에는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주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학생, 연구원, 또는 사회적인 집필가에 해당하므로 #1, #3의 주체와 구분된다.
#1과 #3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모든 '개인'. 특히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일종의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두번째 글을 쓰는 주체의 의도와 글의 내용
주체와 명확하게 구분되기는 힘들며, 주체와 함께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내용인데 즉 주체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글을 쓰느냐에 대한 이야기이다.
즉,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1.은 소외된 개인의 기억, 이해받고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 내 삶에서 나만이 알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험과 변화 그리고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떠한 결론이 도출될 필요가 없는...
#3은 스스로의 사고에 대한 고찰과 기록. (Comt; 기억의 단초 라는 측면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많이 닮아 있음) 뇌에 기름칠하는 비유를 들어 사회전반에 대한 이슈, 또는 Subject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다. (Comt;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의 성격이다)
(그리고 또한 모기는 '설득'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는 세 번째 분류에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2는 '연구'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음 이것 또한 세 번째 분류에서 이야기 하는 게 더 용이할 듯 하나, 결론적으로 어떠한 Subject에 대한 연구적인 개인의 관찰, 사고의 정리. 라는 측면에서 #3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결론이 반드시 도출되어야 한다.

세번째 글을 읽는 대상, 과 영향력:
은 내가 Focus하고자 하는 부분이 될 텐데, 따라서
#1은 대상이 불특정 다수여도 상관 없음. 사실 대상이 실재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는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옆에 있을 법한 누군가에 대한 배설의 행위.
예를 들어 블로그에 올라오는 일상다반사적인 이야기와 이에 대한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친절한 댓글이 그 결과물이다. 이러한 글은 글 읽은 상대방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의 행사가 아니라 개인의 배설과 만족에 그칠 뿐이며, 이는 #2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종교활동에 비유된다. (Comt; 일종의 허세랄까. 허세라는 것도 자기만족의 일환이니..)
#2는 세상에 대한 Open, 즉 '발행'을 목적으로 하므로 실재적인 대상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러할 경우에는 영향력 있는 대상에게 글을 '읽힘'으로써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류에의 봉사, 공공성. 등 사회 진보적인 결과물의 도출과 기여를 주장하는 것이다.
#3의 대상은 모기가 직접적으로 밝히듯이 1차적으로 나 자신이며, 2차적으로는 이 글에 공감하거나 반박하여 설득가능할 수 있는 실재적/비질재적 대상까지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사고에 대해 정리하고, 생각들을 끼워맞추고 합리성과 논리성을 갖추어 상대방에 대한 '설득'의 가능성을 지니는 형태까지 글을 발전시킬 것.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만족. 그것들의 상호과정을 통해 '개개인'의 생각들이 발전해 감으로써 사회 전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가까울까. 아니, 중요한 것은 내가 쓰는 글은 어떠해야 할까?

니체 극장을 읽으면서
나의 사고와 행동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걸까. 그것이 아니면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일일 뿐인걸까. 지하에 모여든 부적응자의 옹알이일 뿐인걸까 하는 고민들을 했던 바 있다.

물론 과거에는 구체성을 상실한 모호한 내 글들이 나 스스로에게만 기억의 단초를 제공한다면 만족한다고 이야기 한 바 있으나,

이렇게 글을 읽고, 사유하고, 정리하며 또한 글을 쓰고 있다 보면.

현재 사회의 고립된 개인으로서, 나 또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떠한 '대상'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 진다.

다만, 이에 대해 어떠해야 한다는 고민을 이때까지 하지 않았던 바, 아무런 책임감 없이, 결과물과 영향력 없이도 뱉아버리고 마는 배설행위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글을 쓸 때의 머뭇거림. 불편한 감정의 실체는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책임감. 영향력에 대한 무게감을 가지고 생산적인 글을 쓰는 때가 아니라면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한 배설물을 온라인을 통해 타인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폭력행위가 아닐까 하는
고민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명.

(그렇다고 인류에의 공헌을 위한 장대한 의도와 의무감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면 난 아직 미천하므로 글을 쓸 수 없기에 이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고민하는 걸로)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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