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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side

상무님이 주신 글

아버지는 2011년 봄에 가족들의 곁을 떠나셨다.
큰 병은 없으셨지만 계속된 독감에 탈수 증상까지 보여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2주 정도 중환자실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짐작했지만, 이처럼 황망한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정작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마음 속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듣지도 못한 채 보내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2주 동안 병실을 지키면서 짧은 면회시간 틈틈이 의식이 없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그저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분이셨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지 않는 한 사랑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법이 없었다. 내가 중학교로 진학할 무렵 거짓말처럼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사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때마다 집 크기가 줄어들었다. 낮에도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과 증오심이 매일매일 자라던 때였다.

내가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를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정확치 않은데, 어느 날 안방 서랍에서 뭘 찾다가 비닐커버가 있는 대학노트 한 권을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익숙한 아버지의 필체… 그 일기를 쓸 당시 아버지는 어떻게든 재기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면서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계실 때였다. 망치로 머리와 가슴을 세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당신의 처지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아들들, 특히 막내였던 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를 본 이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여전히 살가운 말 한마디 하시지 않았지만,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진심에 대해 회의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을 때면, 일기의 한 구절을 읽는 아버지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무망한 세월은, 어린 아들이던 나를 어린 아들들을 둔 아버지로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 세대와 많이 달라지긴 했겠지만, 나 역시 살가운 말이 입에 잘 붙지 않는 경상도 아버지이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느낀 바가 있어 몇 해 전부터 나도 일기를 쓰고 있다. 매일 쓸 때도 있고 한 달 만에 쓸 때도 있다. 내용은 다양해서, 일상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재판에 대한 이야기나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망원경으로 혜성을 살피듯이 자신을 향해 매일 적어도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카프카의 경구처럼 2012년 목표를 매일 단 한 줄의 글이라도 쓰는 것으로 잡았고, 아직은 그 목표를 지키고 있다.

일기와 같은 사적인 글쓰기는, 일상을 추수하여 반성하게 하고, 불분명한 감정이나 생각을 정리하게 한다. 표현된 순간 그 글은 독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언명이 되어 스스로를 구속한다. 하루를 정리하면서 마음 속 생각을 진솔하고 담담히 글로 써 나가는 행위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허공으로 금세 사라지는 세월을 잡아 두는 사적 기록이며, 상처받은 자신에 대한 위로이자 치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수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사진이나 영상, 심지어 말조차도 글이 주는 감동을 결코 따라 갈 수 없다.

늦은 시간에 서재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노라면, 간혹 아이들이나 아내가 뒤에서 훔쳐보기도 하고, 다음 날 출근한 뒤에 일기장을 몰래 읽어봐야겠다고 수군대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 일기가 들킨 것 같지는 않다. 언젠가는 아내와 아이들이 내 일기를 읽고, 내가 어떤 생각으로 재판에 임했고, 불의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했으며, 자연과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했었는지를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간혹, 아버지가 계속하여 일기를 쓰셨더라면 내가 쓰고 있는 이런 내용의 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가 못다 쓰신 일기를 내가 대신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내 아버지의 짧은 일기를 읽은 뒤로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진심을 회의하지 않았듯이, 내 일기로 내 아들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기를 바라고, 세월이 흘러 내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아들들이 내가 못다 쓴 일기를 마저 써내려 가주기를 희망한다.

부산지법 박주영 판사

 

 

상무님이 "부산지법 모판사가 쓴 글인데 잘썼네."라며 보내주신 글. 이히. 우리우리 상무님

밑줄친 부분이 굉장히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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